2026년 4월 21일 신현송 총재가 한국은행 총재로 부임했다.
BIS Working Paper No. 1335 "Tokenomics and blockchain fragmentation"(2026년 3월)은 부임 직전, BIS 경제자문관 시절의 통찰을 집대성한 중요한 논문이다. 이 논문에 담긴 시각은 앞으로 한국은행의 디지털 화폐 정책의 핵심 가이드라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총재는 스테이블코인의 변동성과 안정성 부족을 강하게 비판하며 회의론자로 분류되었으나, 최근 인사청문회와 취임사를 통해 '보완적, 경쟁적 공존'이라는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면서 스테이블코인 전망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논문과 총재의 취임사(링크)를 바탕으로 향후 한국의 디지털 화폐 및 스테이블코인 정책 방향성을 예측해보자.
1. "토크노믹스와 블록체인 파편화" 논문 톺아보기
"왜 블록체인 기반의 민간 화폐는 화폐의 본질인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파편화될 수밖에 없는가"를 경제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핵심이다.
화폐의 본질, 강한 네트워크 효과
전통적인 화폐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하나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퍼블릭 블록체인은 이와 반대로 시스템이 여러 개로 쪼개지는 '파편화(Fragmentation)' 현상이 발생하며, 논문은 이것이 블록체인의 구조적 한계임을 입증한다.
- 돈은 약속이다: 화폐는 "남들이 쓰기 때문에 나도 쓴다"는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하는 조정 장치이다.
- 단일성(Singleness): 화폐가 사회적 가치를 가지려면 누구나 동일한 가치로 인정하는 '단일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탈중앙화 컨센서스의 경제적 비용
이 논문에서는 '글로벌 게임 이론'(참고 논문)을 적용해 체인 검증인들의 행동을 모델링했다. 블록체인이 중앙 권력 없이 운영되려면, 장부를 기록하는 검증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어 그들이 정직하게 협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 보상의 딜레마: 체인이 보안을 유지하려면 검증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 보안이 철저할수록, 즉, 다른 검증인들의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할수록 검증인이 요구하는 보상은 커진다.
- 혼잡 통행료(Congestion Rents): 보상은 결국 사용자의 수수료로 충당된다. 체인의 높은 보안성은 필연적으로 높은 수수료와 처리 용량 제한을 유발한다. 블록체인은 일부러 처리 용량을 제한해 수수료를 높게 유지함으로써 검증인 보상을 보장해야 한다. 이런 혼잡은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탈중앙화 합의 구조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다.
파편화
- 새로운 체인의 등장: 특정 체인의 수수료가 너무 비싸지면, 보안 수준은 조금 낮더라도 수수료가 싼 새로운 체인들이 계속 생겨난다.
- 기존 체인(예: Ethereum): 보안은 높지만 수수료가 비싸 기관 투자자나 대형 프로젝트만 남음
- 신규 체인(예: Solana, Tron, ...): 보안 수준(합의 임계치)을 낮추는 대신 수수료를 낮춰 소액 결제나 일반 사용자를 흡수함
- 유동성이 여러 체인으로 흩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높여주는 '네트워크 효과'가 깨지는 악순환을 부른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자신이 올라타 있는 체인의 이러한 파편화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의 한계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사가 같더라도 실행되는 체인이 다르면 서로 호환되지 않는 별개의 자산이 된다. 체인 간 이동을 위해 브릿지를 써야 하지만, 이는 보안 취약점과 비용, 지연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블록체인 기반의 화폐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단일한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든다.
미래 통화 시스템 설계
Computer science 상 발전(더 빠른 알고리즘, 효율적 데이터 구조 등)이 직접적인 비용은 낮출 수 있어도, 글로벌 게임 이론에 기반했을 때 사람들 간 전략적 불확실성에서 오는 조정 비용은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미래의 화폐 시스템은 블록체인에만 의존하기보다, 중앙은행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통합 원장 시스템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리하자면, 논문에서는 탈중앙화의 기술 수준은 좋지만, 화폐로서의 기능은 중앙은행의 신뢰 기반이 없다면 파편화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제공하는 CBDC와 예금 토큰이 중심이 되어 화폐의 단일성을 보장하고, 그 기반 위에서 민간의 혁신이 일어나는 '2계층(Two-tier)'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글로벌 게임 이론 (Global Games Theory)
각자가 가진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남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이 전체 시스템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이론. 논문에서는 이를 통해 블록체인에서 조정 비용이 구조적으로 발생함을 증명.
💡 조정 비용 (Coordination Premium)
- 블록체인: 서로를 믿게 하려고 막대한 조정 비용(수수료)을 지불해야 함.
- CBDC: 중앙은행이라는 공신력이 이미 조정을 완료했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추가적인 조정 비용을 낼 필요가 없음.
💡 통합 원장 (Unified Ledger)
CBDC와 은행의 예금 토큰, 그리고 다양한 디지털 자산을 하나의 공통된 프로그래밍 가능 원장에 담는 인프라. 서로 다른 체인으로 흩어진 자산을 하나로 묶어 '화폐의 단일성'과 거래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모델.
2. 한은의 향후 방향성 전망
논문의 핵심인 '파편화 방지'와 '화폐의 단일성 유지' 관점에서 디지털 화폐 관련 정책 방향성을 전망해보자.
2-1. 예금 토큰의 상용화 (프로젝트 한강 2단계)
민간 블록체인의 높은 수수료와 파편화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기관용 CBDC라는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고, 그 위에서 은행들이 예금 토큰을 발행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 실거래 환경 조성: 2026년 상반기부터 약 8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실거래 파일럿을 통해 보조금 지급, P2P 송금 등을 테스트하며 실제 쓸 수 있는 디지털 원화 환경을 조성한다.
- 신뢰도: 민간 코인과 달리 예금 토큰은 중앙은행의 CBDC로 즉시 환전되므로, 논문에서 강조한 '화폐의 단일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모델이 될 것이다.
2-2. '규제된' 스테이블코인으로의 질서 재편
신 총재는 청문회에서 스테이블코인과의 보완적, 경쟁적 공존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는 아무나 발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논문에 기반하면, 보안이 취약하고 파편화된 퍼블릭 체인 기반 코인보다는 규제 준수 역량이 검증된 은행권 컨소시엄 중심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우선 허용할 가능성이 크다.
- 서로 다른 민간 스테이블코인들이 파편화되지 않도록, CBDC 인프라 내에서 상호 교환이 가능하게 하는 표준안이 나올 것이다.
2-3.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국제화
총재는 취임사에서 원화 국제화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는 이익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달러 의존도 탈피 (환율 안정)
- MSCI 선진국지수 편입: '해외 투자자가 원화를 얼마나 쉽게 사고팔 수 있는가'가 MSCI 편입의 핵심 기준
- 새로운 수익원 창출: 원화가 국제 통화로 자리 잡으면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원화 자산(채권, 주식 등)을 보유하려 할 것이고, 국내 금융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
이런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액션 아이템은 결국 원화의 디지털화로 수렴한다.
- 외환시장 24시간 개장과 맞물려, 국외 시장 및 역외 거래에서 디지털 원화가 결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가상자산 2단계법 등)이 조속히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 논문에서 언급했듯, 국경을 넘나드는 디지털 화폐는 자본 유출입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 이런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거시건전성 프레임워크'를 디지털 화폐 시스템 내에 프로그래밍하여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장치를 함께 도입해야할 것이다. 원화를 블록체인화하여 거래되도록 하는 것 자체로 장부를 통해 돈이 전 세계 어디에 있든 한국은행이 실시간으로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 기본적인 감시 수단을 갖추게 된다.
- 거시건전성 프레임워크(Macroprudential Framework): 금융 시스템 전체의 파국(뱅크런, 외환위기 등)을 만들지 않도록 예방하고 관리하는 종합적인 방어 체계
3. '신뢰의 엔진'이 바뀌는 시대
마무리 짓자면, 살펴본 자료들을 통해 기술적으로는 민간의 스테이블코인과 공존하는 인프라를 만들며 그 가치의 뿌리는 중앙은행의 신뢰에 두려는 신현송 총재의 철학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보완적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스테이블코인을 완전히 인정해서라기보다, 한은이 주도하는 규제된 틀 안으로 끌어들여 위험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주도권 향방은 기술력도 기술력이지만, 제도권 인프라(CBDC)와 얼마나 잘 연동되고 규제를 준수하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다.